베드로의 3번 부인과 우리

김대규 장로

복음서마다 주님이 잡혀가신 과정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3번 부인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막 14:66-72).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주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신 메시지를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활달하며 제자 중에 제일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였는지도 모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엄청난 고백을 한 것과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친 것(요 18:10)등을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 베드로가 궁지에 몰린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공통적인 메시지는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을 마가는 당시 배교의 유혹에 직면했던 초대교회에 대한 교훈으로 주려 했다는 견해가 있음을 볼 때 세상 풍조에 젖어 드는 현대 교회들에 대한 경고로 대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질과 명성에 약해진 교회들을 세상이 몰아칠 때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교회로서 당당히 변명하며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떨치지가 않는다. 현대 교회들이 나름의 울타리로 쳐놓은 신학 때문에 명예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주춤하는 모습은 없는지 우리는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베드로의 3번 부인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10번 20번이 될 수도 있는 우리의 문제라고 보인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다져졌다고 해도 너무나 완벽할 정도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나약해진 신앙 체질로는 어찌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그마한 불편이나 부족이 있어도 인내가 이에 따르지 못하고 신앙보다는 현실과 타협이 앞서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합리적이고 부담 없이 적당히 믿고자 하는 우리에게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온다면 담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떨칠 수가 없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힐문할 때 베드로는 부인하며 앞뜰로 피하였다고 했다(막 14:66-68). 그 당시 여종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다.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자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더욱이 여종이 나사렛 예수라고 감히 불렀다. 예수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 이름 앞에 흔히 지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예루살렘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하여 특권적인 의식이 있었는데 그런 의식 속에서 나사렛을 들먹였다면 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멸시적으로 공격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다분히 이런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변명만 했다. 그 상황에서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했어도 붙잡힐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보는 정황해석이 있다. 아니 붙잡힌다 하더라도 떳떳이 시인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모든 신경이 예수님께로만 가 있어서 자신의 상황적 대처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거나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아 무리 안에서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 돌아봄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도전은 언제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작은 일,큰 일이 상관없이 하루에도 수없이 다가 올 수 있다. 이 땅은 영적 전쟁터이기에 우리가 여기서 사는 한 항상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큰 일보다는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일에서 우리를 쓰러트리려고 한다. 당연히 큰일이면 우리는 긴장하고 기도로 중무장을 한다. 전신갑주를 단단히 하고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주의 보혈의 능력이 총동원되고 심지어 천군 천사가 동원됨을 알기에 사탄은 알게 모르게 쓰러트릴 수 있는 일상의 것들로 공격을 한다. 그래서 현실에 얽매어서 씨름하게 하여 신앙의 깊이를 갖지 못하게 하고 신앙의 방향을 흩트리게 만든다. 베드로도 하찮은 여종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추정할 한 가지 일이 있다. 이 사건 바로 직전 예수님과 기도하기 위해 겟세마네로 갔다. 예수님의 그 유명한 겟세마네의 기도 그러나 그 시간 주님이 시험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육신이 피곤하여 잠을 잔(막 14:36-42) 일이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허가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도 생각지도 않은 일상생활에서의 느슨한 틈으로 우리의 허를 찔려 믿음에서 쓰러짐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허를 찔렸어도 무감각하거나 늘 있는 것으로 지나칠 수 있다는 점이다(눅 21:34). 이점에 익숙해져 있다면 자신의 신앙에는 빨간불이 커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무장하고 깨어 있어 모든 것에 대비해야 하는 긴장이 필요하다(눅 21:36). 이것이 우리가 깨닫고 행해야 할 점이다.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믿음은 자기의 힘으로 된다고 생각한 완악함을 깨닫고 통회자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변치 않고 자비한 모습으로 연약한 자신을 지켜 주시는 은혜 앞에 자아가 깨어져 결국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하였다. 주의 뜻을 이루시는 한 단계의 사건인 것처럼 우리들도 주의 뜻을 이루는 섭리 안에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도 베드로의 믿음처럼 되어야 한다면 무리일까?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도 믿음 위에 선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눅18:8)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서머나 교회에 대해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무슨 뜻일까? 베드로의 사건을 통해 종국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이다. “-깨어라–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는 깨어 있어 영적 전쟁에서 결코 승리해야 한다.  Warrior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지조가 있어야 한다. 베드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 각자가 갖게 된 메시지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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